모든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성경을 접하게 된다.
성격이 말하거나 가르쳐주는 내용을 정확히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배를 통해 목사님의 설교를 듣거나, 여럿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거나 혼자만의 큐티(QT, Quite Time)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여 신앙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공부나 큐티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관련된 책이나 자료, 모바일앱 등이 제공된다.
이처럼 성경공부를 돕기위한 수많은 서비스들이 넘치지만
좀처럼 공부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
이유는 인간의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 반복적으로 공부하고 학습해도
공부한 것을 망각하게 되고 좀처럼 장기기억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나 지식은 장기기억으로 남아 있어야
필요한 상황에서 장기기억에 있는 정보나 지식을 즉시 끄집어 내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정보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특히 학생들) 반복적인 공부나 학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공부나 큐티를 돕는 서비스들은 성경 전문가나 성직자들이 성경의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설명해 주는 책이나 자료를 공부해도 망각으로 인하여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과거네 분명히 배우고 공부한 것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고,
그것을 공부했던 것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공부법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읽거나 쓰는 반복학습이고 시각적 효과를 활용하기 위해서 마인드맵이나 구조화된 정리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단기기억은 좀처럼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기 어렵다.
필자는 15년 이상 질문을 연구하고 창의력과 기억력, 소통 등에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그리고 질문이 단기기억을 순간적으로 장기기억으로 전환해 주는 놀라운 효과가 있음을 검증했다.
이것이 맘스퀘스천에서 말하는 "15가지 질문"이다.
15가지 질문을 동화책 독서와 토론에 적용했고,
"수포자" 문제를 해결하는 수학(매쓰)에도 적용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알리고 있다.
이런 시도와 도전을 하면서
최근에는 영화로 만들어진 "나랏말쓰미"에 나오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높이기 위해서 질문을 활용한 공부법을 개발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에 질문을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나서,
성경 공부와 큐티에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큐티뉴젠"이라는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선정하여 질문 개발을 시작했다.
아래 자료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홈페이지 본문을 그대로 옮겼다.
제목 축복의 근거를 찾으시는 하나님
본문 사무엘상 14:1-23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20.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21.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본문해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복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어느 가정이 복을 받는다면 복받을 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을 받는다면 그 복의 근거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모세를 통해서 해방을 주셨습니다.
페르시아 나라에서 몰살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 살려 주셨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마다 한 사람의 사사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은 요나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승리의 근거가 바로 요나단이었습니다.
일은 아버지가 저지르고 수습은 아들이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요나단은 결국 아버지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책임지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합니다(1절).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요나단이 수종을 드는 소년에게 블레셋 부대로 가자고 합니다.
이때 일을 저지른 사울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2절)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었습니다.
믹마스 지역의 최남단입니다.
미그론이란 말의 의미는 ‘절벽’입니다.
북쪽에서부터 포위하여 내려오는 블레셋을 피하여 막다른 곳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울과 함께 하고 있는 군사가 6백명이라고 구태여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사무엘상 13:5).
그의 군사적 형편이 블레셋의 대군에 비해 어림도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보여 주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언급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31절)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절망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면 가장 큰 희망이 됩니다.
현실이 절망적이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낼만한 일에 도전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사울은 계속 한심한 모습만 보여줍니다(3절).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에봇'(Ephod)은 대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레위기 16:4)와 하나님께 특별한 뜻을 물을 때 착용했던 특수한 제의적(祭儀的) 의복입니다(출애굽기 28:6-14).
따라서 '에봇을 입고 있었으니'라는 말은 아히야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왕의 옆에 함께 있는 것은 사울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애굽기 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레위기 8:8).
이같이 왕들이 신의 뜻을 묻기 위해 제사장을 옆에 두는 일은 성경 외적 문헌에도 많이 나타나며 이것은 자신의 왕권(王權) 과시를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제사장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옆에 두므로 자신의 왕권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입니다(4-5절).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사울이 아무리 애를쓰면 뭐합니까?
우뚝 선 보세스와 세네라는 두 개의 절벽 사이에 갇힌 인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우리는 절벽 사이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복을 받기를 원하세요?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십시오.
우리 교회가 복을 받기를 원하세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는 근거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근거가 되는 사람은?
1.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6절)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앞이 막막했습니다.
군사력을 볼 때 비교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더욱이 리더인 사울왕은 철저히 비신앙적이었습니다.
환경적으로 이길 수 없는데 믿음까지 없으니 얼마나 막막합니까?
생각하기조차 싫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것보다 더 싫은 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어떤 특징을 지닙니까?
첫째로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요나단의 이 언급을 볼 때 가슴이 아프고 저립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는 소년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싸우겠다고 나아갑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죽으면 죽었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욕당하는 것을 눈뜨고 못보겠다는 겁니다.
환경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답답한 상황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다윗의 심정도 요나단과 똑같았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죽으면 죽었지 그것을 눈뜨고는 못보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부모님이 내 부모님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면 목숨 걸고 싸웁니다.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나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의 존재가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나의 삶의 깊이와 불안한 미래를 단번에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박살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시는 것도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절대화합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부하 한 명을 데리고 블레셋과 싸우러 가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하실까 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만 하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도 풀무불에 던지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풀무불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다니엘 3:18).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반드시 받아들이셔야 할 부분입니다.
올바로 신앙생활해야하고 올바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인식해야할 부분입니다.
예를들어 “장담하건 데 저 사람은 절대 안돼!”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지 하나님 생각이 아닙니다. 모르는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계속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없다고 말하지 누구의 이름을 지적하며 그 사람은 절대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반드시 싫어하실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를 들어 목회자가 기도해 주어야지 만이 병이 낫는다라고 절대화해서는 안됩니다.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 반드시 낫는다라고 말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또한 반대로 목사가 기도해 준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절대 아니다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병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왜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단이 왜 이단이 됩니까?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화해야 하는데 자기 경험, 논리 혹은 지식을 절대화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신앙은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단순한 겁니다.
단순한 것을 절대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항상 복잡하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도록 인도합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혹은 사업이 잘되든지 안되든지 하나님께 맡깁니다.”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할 일을 할뿐이고 나머지는 하나님 몫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려는 전도 대상자가 있습니다.
그 분을 전도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사람이어서 안돼!” “내가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 안돼!”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될꺼야!”하는 자세도 전적 의탁이 아닙니다.
전적 의탁은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레위기 26:8)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4)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이나 재능,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2.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합니다(7절)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이라는 승리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승리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요나단 혼자가 된 게 아니었습니다.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무기를 든 자'라고 언급된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무기든 자들이 있었습니다.
무기든 자는 아비멜렉(사사기 9:54)이나 기드온(사사기 7:10)이나 심지어 일개 장군인 요압(사무엘하 18:15)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도 소년시절에 사울의 '무기 든 자'로 선택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비서직 이상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이 사울에게는 없었지만 요나단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역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함께 일하거나 일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역은 불가능합니다.
둘째로 용기를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힘들 때 더 낙담케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동역자는 항상 긍정적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잘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용기를 갖게 합니다.
셋째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잘될 때는 같이하다가 안 될 때는 조용히 빠져나가는 사람은 동역자가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의견이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역자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떠나지 않습니다.
동고동락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동역자입니다.
넷째로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동역자는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른길을 제시해 주고 잘못된 길로 가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언할 때 항상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①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조언은 조언이 아닙니다.
그냥 충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② 내 조언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③ 내 조언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19세기에 런던에서 가장 유명했던 설교자 알렉산더 맥클라렌 목사님은 어느 주일날 그 도시에서 무신론자로 잘 알려진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예배를 마치자 그는 무신론자에게 4주동안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를 설교하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네 번째 주일예배가 끝난 뒤 무신론자는 예수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맥클라렌은 너무 기뻐서 어느 설교에 특히 감동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물론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독교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 할머니였습니다. 몇 주전 교회에서 나가다가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찬 할머니 한 분을 보았는데, 길이 얼어서 걷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제가 좀 도와드렸습니다. 그 분이 저를 쳐다보면서 '선생님, 제 구주이신 예수님을 선생님도 아시는군요. 그 분은 제 인생의 전부예요. 선생님도 그분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몇 마디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평신도의 몇 마디가 4편의 설교보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나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3.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8-10절)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요나단은 블레셋 군사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민감했습니다. 사람마다 민감한 부분이 다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이 부분에서 같아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롭고 분별력있는 사람이 될까요?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는 잘 하면서 자기는 모를 수 있습니다.
비판은 잘 하면서 비판받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판하려거든 자기 자신도 비판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귀머거리는 사실 심각한 귀머거리 장애가 아닙니다.
귀머거리는 사실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귀머거리라도 써놓은 것이면 읽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귀머거리는 남의 의견을 좀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단순히 귀가 먼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닫힌 사람입니까?
둘째로 타인에 대하여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최고로 여겨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요 배움의 대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령님이 해주셔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성령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랑의 대상이어야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정에 근거해 사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자기 경험에 근거해 사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엉뚱한 것에 근거하여 사는 분들은 존경이나 배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단순히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셋째로 환경에 대하여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이 어떤 상황인지 교회가 어떤 상황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어떤 상황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환경이 어려우면 왜 어려운지 평안하고 잘 풀리면 왜 그런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삶이 늘 평안하고 별로 큰일이 없이 무난하게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냥 평안하게 잘먹고 잘살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엉뚱한데 신경쓰지 말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목회자의 생활을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집을 비롯하여 각종 세금까지 교회가 책임집니다.
물론 사례비가 남아돌 정도로 하지는 않지만 생활하는데 걱정이 없도록 합니다.
오직 주의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진정한 감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에 부닥쳐본 사람이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전혀 어려움이 없던 사람은 약간의 어려움만 있어도 불평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항상 어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은 오히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압니다.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어렵고 힘든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감사의 삶을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어려움에 처해 보아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잔의 커피에는 사방의 이웃집을 40cm의 두께로 감싸고도 남을 수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소량의 물이 얇게 퍼지면 시야를 온통 가릴 수 있습니다.
잔뜩 낀 안개가 길을 가로막으면 당황하면서 태양이 위에서 비치면서 안개를 말리고 있다는 사실은 잊습니다.
왜 당황할까요?
바른 시각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현실의 벽은 직접적인 성격 때문에 사실보다 높게 보이게 마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와 근심은 우리의 현실 상황에 마치 안개처럼 작용하여 사물을 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빨리 해결하려고 허둥대며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돌발 사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십니다(출애굽기 3:7; 베드로전서 5:7).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짙은 안개에 가려 갈 길이 막막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건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실패하도록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은 어떤 문제건 우리가 의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뚜렷이 드러내시려고 마련하신 기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으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평안할 때는 잘 못 느낍니다.
이상하게도 어려워 보아야 강하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캐트린 쿨만이 쓴 [위대한 항해사는 거친 바다에서 만들어집니다]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많은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책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일부 포도나무는 많은 잎이 있었지만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농부는 그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그녀에게 들렸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문제로 고통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농부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고, 써레질과 경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란다.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에 허락한 시련들로 인해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옵나니,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옵소서!"
모든 소원과 꿈과 희망이 좌절될지라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주시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겁니다(11-12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 편이시라는 확신입니다.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이러한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13-15절).
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우스운 존재였지만 한순간에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행하십시오.
반드시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은 우리를 경외합니다.
블레셋 가운데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16-17절).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이 모습을 보고 받고 사울이 점호를 하여 누가 없는지 파악하게 합니다.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그리고 사울의 한심한 모습이 또 나옵니다(18-20절).
제사장을 통해 요나단의 안전과 전쟁이 어떻게 될지 하나님께 물으려 하다가 블레셋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손을 거두라고 합니다.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20.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블레셋이 자멸하는 모습이 나타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블레셋에 빌붙어 살던 히브리인들이 사울과 요나단을 따릅니다(21절).
21.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그리고 숨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블레셋을 추격합니다(22절).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이 전쟁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나타난 근거요 토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생명을 건 요나단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깁니다.
이룰 수 없는 일을 성취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끝을 맺습니다(23절).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bethaven)은 믹마스 서쪽 약 1.2km 지점입니다(사무엘상 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사무엘상 13:5)
블레셋 족속의 군대가 주둔했던 믹마스는 '벧아웬 동편'입니다.
즉 여기서는 '벧아웬을 지나니라'라고 언급함으로써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제 자신들의 본국 방향인 서쪽으로 패주했음을 의미합니다(31절).
벧아웬은 어떤 장소였습니까?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근심의 장소였습니다.
염려의 장소였습니다.
슬픔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떤 장소로 바뀝니까?
누구로 인해서 바뀝니까?
하나님은 요나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바꿔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축복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까?(1-5절)
2. 하나님의 축복의 근거가 되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지닙니까?(6-10절)
3. 이스라엘 가운데서 축복의 근거를 찾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11-22절)
4.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벤아웬은 원래 어떤 장소였습니까?(23절, 사무엘상 13:5)
원문출처 [큐티뉴젠]
http://www.qtnewgen.org/main/sub.html?Mode=view&boardID=www2&num=1375&page=&keyfield=&key=&bCate=
큐티뉴젠에서도 "생각을 위한 질문" 4개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위의 4가지 질문만으로 성경 본문과 해설을 이해하고 기억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에,
필자가 맘스퀘스천의 15가지 질문 모델을 기준으로 추가적인 질문들을 개발했다.
[큐티를 위한 질문들]
1. 하나님은 왜 복을 주시는가?
2.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왜 항상 근거를 찾으실까?
3.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근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4.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해방시키신 근거는 무엇이었나?
5. 블레셋 부대를 물리치도록 하신 하나님 축복의 근거는 무엇이었나?
6. 왜 블레셋 부대와 전쟁을 하게 되었나?
7. 블레셋을 피하여 도주한 장소는 어디였는가?
8. 당시 이스라엘 군사의 숫자는 얼마였나?
9. 이스라엘이 군대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에 항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0. 당시 요나단은 어떤 기도를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11. 만약에 요나단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됐을까?
12. 사울은 왜 그런 판단과 행동을 했을까?
13. 우리들은 평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까?
14. 당시 상황에서 요나단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들이 가능했을까?
15. 요나단이 본문과 같은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6. 위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17. 위 사건을 통해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해야 할까?
18. 현재의 교회생활에서 내가 가장 우선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관점과 방향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도와 기억력이 높아짐을 알 수 있다.
질문은 이해력을 높이고 기억력도 증가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맘스퀘스천의 15가지 질문이 학습효과를 높이고 어려웠던 공부를 보다 쉽고 효과적으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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